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맘루크 왕조]] ===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의 노예병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육성한 군대다. 주로 중장기병으로 활약했으며 무기로는 창과 칼, 철퇴를 사용했다. 궁술에도 뛰어나 충격기병 이외에 궁기병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다. 구성원의 대부분이 튀르크족 출신이었던 덕에 기마술에 능했고, 유목민족들이 구사하던 초원전술에도 익숙했다.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은 페르시아와 시리아를 정복한 뒤 이집트까지 진출하려 했지만, [[몽케 칸]]이 죽자 훌라구는 후계자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주력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훌라구는 회군하면서 부하 장수 키트부카에게 1~2개 투멧 (1만~2만명) 정도의 병력을 남겨 두었다.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이 후계자 구도를 놓고 내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병력을 모아 시리아에 남은 몽골군에게 선빵을 날리러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키트부카도 맘루크군을 상대하러 나왔다. 1260년 6월 양군은 갈릴리 근방의 [[아인잘루트 전투|아인 잘루트에서 맞붙었다]][* 이 때 양측의 병력은 각각 2만 내외였다.]. 술탄 쿠투즈는 [[바이바르스]]와 연합하였는데 바이바르스는 아인잘루트 근처 지리에 훤했다. 바이바르스는 언덕 위에 주력을 숨긴 후 거짓으로 패한 척 달아나 몽골군을 유인한 뒤 포위했다. 결정적 순간 쿠투즈의 맹렬한 돌격에 몽골군은 [[개발살]]났으며, 지휘관인 키트부카가 사로잡혀 처형당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군이 폭발성 탄약을 사용하는 대포를 쏘자 몽골군 군마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효과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물며 훨씬 복잡하고 목숨이 왔다리갔다리 하는 전장에서야 말할 나위 없음은 물론이다.]. 이 전투 후 회군하는 길에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죽이고 자신이 술탄에 올랐다. 이 전투를 더 이상 몽골이 이집트를 넘보지 못하게 된 분수령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실 몽골이 이 이후로 이집트 침공에 실패한 이유는 동쪽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다.[* 데이비드 모건 - The Mongols] 그 일은 [[몽케 칸]]의 사후 몽골 제국의 분열이다. 이 후 몽골은 더 이상 서쪽으로 대규모 원정군을 보낼 여력을 상실했다. 아인잘루트의 패배에 대해 들은 훌라구는 복수를 다짐했지만 얼마 안가 병으로 죽었고, 일 칸국도 북쪽 [[킵차크 칸국]]과의 내전 때문에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없었다.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 칸]]은 제국의 서쪽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고 동부에서만 정복 활동을 벌였다. [[아인잘루트 전투]]는 일 칸국과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기나긴 싸움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훌라구의 후예들은 일 칸국의 지배자 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으며, 북쪽의 킵차크 칸국과도 종주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내전을 종식시키고 승리자가 된 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본을 공격한다|맘루크를 공격했으나]] 한차례를 성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졌다. 맘루크들이 악명높은 몽골군을 상대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청야전술]]과 유능한 지휘관의 유무가 크다. 몽골군 역시 강한 군대였으나 기본적으로 [[민간인|일반 백성들]]을 무작위로 징발한 징집군이었기 때문에 오직 전투기술만을 갈고 닦아온 맘루크에 비해 전투력면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었다. 몽골 고원에서 자란 유목민 출신이 아니라, 중동 땅에서 자란 현지민들이 병력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질적인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호라즘의 굴람이나 유럽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맘루크에게는 그들과 달리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고 병사들도 명령에 따라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또한 그 때와는 다르게 제국이 분열되어 본토에서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수적으로 열세였다는 것 정도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방면을 지키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리아에는 대규모 군단이 상주할만한 목초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이 보병을 상대할때 전략은 '''기동하여 얇고 넓게 포위해서 사격전으로 해치운다'''였고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군대와 싸울때의 기본 전략은 '''기동전을 건다''' 였다. 몽골의 말은 페르시아말보다 작아 순발력이 부족하지만 지구력이 뛰어났고 게다가 몽골인들은 다른 군대에 비해 많은 수의 말을 거느렸다. 상대가 겨우 보이는 거리에서 깔짝대며 계속 기동전을 걸다가 상대의 말이 지치면 포위해서 보병을 해치우듯이 처리했다. 그래서 몽골군의 군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초지가 필요했다. 맘루크는 국경지대의 초지들을 없애버리는 [[청야전술]]을 들고 나왔고 몽골군의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는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십자군은 이집트의 이슬람 세력과 적대하고 있었으나 키트부카가 아크레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바람에[*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몽골군은 프랑크인들에게 동맹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고, 오히려 키트부카의 혈육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키부카가 시돈을 공격하게 된 것. 근데 몽골이 제의한 동맹이라는 게 사실상 복속을 요구한 조건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이슬람인보다 몽골인들을 더 큰 위협으로 여기게 된다. 아인잘루트 전투를 앞두고 쿠투즈의 군대는 아크레 근방에서 야영하며 보급을 받았으나 [[십자군]]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1295년 일 칸국의 내전을 끝낸 [[가잔 칸]]은 이러한 요소들을 개선하고자 했다. 그는 여러 제도를 개혁하면서 토지와 군제에도 손을 댔다. 부하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과거 다수의 말을 유지하며 기동력을 활용하던 경기병 체제에서 말 한 두 필에 의지하며 싸우는 전형적인 아랍세계의 기병처럼 바꾸려고 했다.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봤는지 1299년에는 일시적으로 다마스쿠스를 재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잔 역시 맘루크에게 패했고 다마스쿠스는 1년만에 다시 이집트군의 손에 떨어졌다. 1302년에는 다시 한 번 몽골-프랑크 동맹을 맺기 위해 [[교황]]에게 친서를 보냈으나 무시당하고, 결국 1303년에 단독으로 군사행동을 재개했지만 역시나 또 발렸고 이후로 몽골인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을 넘보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